우문술이 군사를 거둬 철수하는 것을 군사를 내어 사면으로 맹렬히 공격을 하니 우문술등은 싸우다 도망하기를 거듭하다가
살수 (청천강)에 도달하였는 데 이때가 7월 이었다.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건너기 시작 할 때 고구려 군이 강을 건너던 수나라의 후미를 총 공격하자 수나라 군사는 대오가 흩어져 걷잡을 수 없이 쓰러졌다.
고구려 군은 수군이 반 쯤 도하하였을 때 공격한 것을 보면 수군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 했고 고구려군은 자신감이 넘쳤다.
지금껏 고구려군은 대형을 갖추고 싸우는 평지의 정규전에서 수군을 이겨보지 못했다.
이날 수군의 후의를 맡은 부대는 9군중 에서 우둔위 장군 신세웅부대였다.<전쟁과 역사 참조>
고구려군은 살수에서 9군 사령관인 신세웅을 전사시켰다. 맥철장이후 거물 장수의 두번째 사망이다.
신세웅부대가 붕괴하자 수군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밤낮으로 하루를 달려 도주하였다.
출동한 병력이 30만 5천 중에서 요동성에 귀한한 자는 겨우 2천 700여명이다. 다만 실중전 30만 2000명이 살수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다. 압록강까지 추격당하는 과정에서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었 던 것이다. 생존자 중의 한사람인 설세웅은 백석산이란 곳에서 고구려 군에게 겹겹으로 포위되었다.
그는 방진을 치고 버텨 보았으나 고구려군은 돌격해 들어오지 않았고 빙둘러 화살을 퍼부었다. 날아오는 화살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전멸의 위기에 봉착한 그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갑옷을 벗어 던지고 경계병200명만 이끌고 돌파를 강행하여 겨우 살아 왔다. 수, 양제는 이를 장하게 여겨 패전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이렇게 적을 심리적 물질적으로 압박해서 스스로 붕괴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쟁의 최고 기술이다.
이런 것은 한두번의 기묘한 전략으로 달성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와 같이 수많은 요소와 부대와 인물 시기적절하게 조화시키고 사용함으로써 그리고 군의 편제, 군기, 병참, 훈련, 연락체계, 지휘관의 능력, 사병의 사기등, 모든 요소가 받쳐줌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고구려는 살수의 일전으로 수나라를 이긴 것이 아니라 요하에서 평양에 이르는 길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전쟁과 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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