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界 戰史 中 단연 最大의 高.隋전쟁과 리더들의 위기극복 리더십
고구려 영양왕 23년(612년) 수양제가 아홉가지의 죄 (九伐)을 해하여 위태롭게 된자를 구하며 하늘의 뜻을 순응하여
고구려를 무찔러서 선왕의 뜻을 계승할 것이다(중략) 수나라 군사의 수눈 113만 3천 8백명,
외형상으로는 2백만명, 물자 수송에 동원된 수는 2배가 되고....
이 전쟁에 동원된 수는 학자마다 다소차이가 있지만 최소 313만에서 400만명으로
세계전쟁사 중에서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원된 전쟁은 오늘날 한번도 없다.
<낱낱히 파헤친 고구려 본기, 김종식3권>
113만 3천 8백명이란 숫자는 수서 (隨書)의 자치통감에 기록된 것을
삼국사기 김부식이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수나라 양제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해야할 명분을 아홉가지들어 당위성을 공포하고 四地에 참배하고 출병하였다고 하였다.
분석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복하려 했던 수양제의 내적 환경을 보자.
1,부친 살해(수문제)의 원죄의식으로 욕망이 닿는대로 사치에 빠져들었다.
2, 즉위와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하다
2백만여명에 달하는 백성을 동원하여 대 운하를 건설하고,
200KM에 달하는 초 호화 선단으로 오직 자신만의 쾌락이 있었을 뿐이였다.
3,궁전과 대 정원, 대규모 식량저장창고 시설 건설
2백만명을 동원하여 호화로움에 극치인 현인궁과 40여개의 별궁을 짓는 등
거대한 건축 광이었다.
4,미녀 후궁과 유희를 즐겼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양제의 호사스런 성격을 보아 서진의 무제(후궁이 만명)에 못지않은 수의 미인을 후궁 으로 모아 곳곳에 별궁에 기거하게 하고 난잡한 애정행각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5, 612년부터 피해망상증으로 인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자료-주지육림-황제의 사치향략편>
수양제의 외적환경을 분석한다
1, 수문제가 고구려를 1차 침입하였으나 임유관 전투에서 30만 대군을 잃고
패배한 것에 대한 父의 복수차원에서 침공 계획을 세웠다.
2,백제의 위덕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때 수나라 군사의 향도(길잡이)가 될 것을 청하였던 적이 있다.
3,608년 신라의 백성들이 8천명이나 고구려군에 잡혀가자 신라는
수나라에게 고구려 토벌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보냈다.
4,고구려 사신이 돌궐족의 계민가한의 장막에 갔을 때 수양제가 돌궐을 순행하다
장막에 때마침 들리게 되었다.
계민가한이 고구려 사신이 온 것을 숨길 수 없어 수양제에게 사신을 소개하게 되었고,
수양제는 사신에게 돌아가 왕에게 일찍 예방할 것을 말하고 그렇게 한다면
"내가 그대 땅을 위부하여 주기를 계민처럼 할 것이요. 만일에 예방치 않는다면 계민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대의 지역을 순행할 것이다."
5,수양제가 중국을 통일하는 데 반도의 작은 오랑캐(東夷)를 정벌해야 위상이 설 수 있고
영양왕이 수양제 이후 조공을 바치지 않는데 불만이 있었다.
6,수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손잡고 오히려 수나라를 침공해 오는 것을 두려워 했다.
'역사 강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나라 2차 침입당시 지휘관(6장) (0) | 2011.09.07 |
---|---|
수나라의 2차 침입(612년)(5장) (0) | 2011.09.07 |
강이식의 임유관 전투가 있었다는 증거--자치통감(4장) (0) | 2011.09.07 |
서곽잡록과 대동운해기록을 인용--임유관 전투 (3장) (0) | 2011.09.07 |
임유관 전투 (2장) (0) | 2011.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