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군씩 파견하였는데 각군마다 거리는 40여리씩 유지 시켰다.
각 군여이 이런 형식으로 출발하였는 데 모두를 출발하는 데만 40여일이 걸렸다.
사기를 북돋우는 북과 꽹과리,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군사 행렬의 깃발은
960리 (400KM)에 달하였다. 이와 별도로 수`양제를 호위하는 어영군 6군이 있었는데
이들의 행렬만 80리 였다고 한다.
이런 대군은 중국역사에서도 초유의 대병력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걸핏하면 100만대군 운운 하지만 이때까지는 10만을 넘어가는 군대가 드물었다.
<삼국지> 의 조조가 형주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백만대군을 끌고 갔다고 하지만 실제 병력은 20만이였다.
형주에서의 전투와 전염병으로 적벽대전을 치르고 있을때 15만이 되지 않은것 같다.
다만 조조가 손권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자기 병력이 80만이라고 허풍을 치긴 했다.
200만이면 전 중국인구의 5~7%에 해당한다.
고구려가 망할 때 인구가 69만호라고 했다
<전쟁과 역사 중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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