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 선생에 대한 백낙준의 글 인용
단재는 史家이다. 그는 사학자로 고증에 깊어서 세속적 사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해박한 지식은 고금을 통하고 예리한 안공은 만사를 관통하였다. 단재는 그의 인간적 성격과 그의 학자적 양심에서 귀착 지은 독특한 사관을 가졌다. 그는 철두철미한 민족주의 사관을 주장하였다. 역사를 我와 非我간의 투쟁으로 보았다.
사서는 '그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라고 하였다.
我는 언제 어디서나 역사의 주체적 위치에서 있어야 하며 非我는 어디까지나 주체세력의 투쟁대상이다
我는비아를 이김으로서 올바른 역사의 전개를 이룩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우리 한 민족의 역사발전에는 화랑도의 독립사상이 내세운 참 아와 비아인 유가의 사대주의의 투쟁이 전개된 기록이라고 하였다.
이 두사상은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서로 다투어 오다가 단재가 지적하는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 있었으니 곧 12세기 중엽초에 있었던 묘청의 난의 실패에 따른 화랑도의 몰락과 유가의 사대주의 의 범람이라고 하였다.
단재는 한민족의 흥망은 그 민족이 지니는 사상적 결탁에 달려있다고 단정하고 한 민족의 불행한 과거는 화랑도의 독립정신을 잃고 유가의 사대사상의 지배를 받은 탓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단재는 사학가로서 민족의 역사를 민족의 내적 생활에서 찾아내려고 했다.
단재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에 살고 활동하면서 외세의 억압 밑에서 사는 우리민족의 주체의식과 독립 사상을 밑바닥부터 캐내어 밝혀주었다. 단재는 그 강직한 성격으로 자기 사상 표시에도 기탄을 두 아니하였다. 시비 곡직을 가름 함에는 추상같이 맵고 대쪽같이 한계가 분명하고 굳고 밝았다. 그에게는 굴종과 타협이 없었다. 그의 엄정한 논리적인 논법은 그의 사관의 장점으로 되어 있다.
그의 저서을지문덕. 이순신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조선사, 조선사연구초등과 언론계를 움직이던 시론과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동치서주하던 활동과 나중에 딴 나라 감옥에서 천추의 한을 머금고 이승을 떠 날 때 까지 그는 조국과 겨레를 위하여 살고 몸바친 애국자, 사학가, 문장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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