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강의

강이식의 임유관 전투가 있었다는 증거--자치통감(4장)

인간심리분석 2011. 9. 7. 12:03

수문제에 이어 수`양제가 황제에 오른 후 고구려 정벌을 선언하면서 고구려의 잘못을 지적하는 대목--

 

지난 날 아버지 문제께서 30만 수륙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군사들은 우리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이전에 군사를 사로 잡았을 때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 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우리는 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군들을 살해하였으며......<중략>

 

수나라가 고구려와 싸워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자존심때문에 기록상 수나라가 패했다고 쓰기가 수치스러워,

장마와 태풍의 핑계를 댄 것으로 보여지나 고구려 해양사연구에서보면 그 시기에는 장마와 태풍이 있는 시기가 아니라고 적혀있다.

 

임유관은 해안을 따라 전개되는 좁은 협곡을 지나 지금의 북경에서 만주로 가는 통로인 동시에 만리장성이 끝나는 곳이다.

 이곳을 6세기 부터 임유관이라고 하였는데, 고구려가 수나라에 타격을 주려면 이곳을 먼저 공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전략상 효과를 노리기 위해 고구려가 수나라 요서지방의 임유관을먼저 공격하였던 것이다. 강이식이 수나라 수군을 공격한 것은 적의 보급차단이라는 명제이다. 수문제의 중국 통일에 맞서 선제 공격을 할수 있었던 것은 자신감이다. 당시 수니라의 요서지빙을 보면 요서관 하나 현도군 하나 호구수는 겨우751호이고 인구수는 약3천명 수준이었다.

지금의 조양일대를 중심으로 조그만 거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곳을 기반으로해서 지방의 소수민족을 통제하는 그런 작은 군사력이었기에 때문에 수나라로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고구려로서는 그곳을 파괴해야만 장차 수니라와의 전쟁에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했다. 그 결과 화가 난 수`문제가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